샤넬이 현실을 즐기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
① 옷에 대한 신념이 뚜렸
② 특유의 능력 보유
③ 환경에 대한 민감도가 뛰어남
④ 실험과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음
패션업계의 거부 샤넬은 예술을 사랑했지만 예술작품을 소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을 때 까지 피카소, 모딜리아니, 브라크, 달리 등 친한 화가들의 그림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않았다. 예술작품보다는 예술가들과 교우하며 순간순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여러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예술 후원은 자선활동이 아니라 유희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게 도왔지만 샤넬이 예술가들에게 너그럽다는 얘기를 듣고 도움을 구하러 오는 예술가들에게는 한 푼도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정도면 샤넬은 현실을 즐겼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돈은 좋은 하인이자, 나쁜 주인이다."
라는 말을 남기면서 평생 돈에 구속되지 않고 삶을 즐기는데 수입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이러한 면에서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모든 관심을 쏟을 줄 아느냐에 따라 지금 당장의 창조성 발휘 여부가 결정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예측성도 내던져버리고 현재에만 완전히 몰두하며 즐긴다. 그러므로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안다. 상황이 변하면 변한 상황에 따라 노선을 변경하고 계획을 내던져 버리고 융통성을 발휘해 변화하는 상황과 시시각각 변하는 문제의 요구사항에 자신을 맞출줄 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자기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스스로를 믿기 때문에 모호하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지 않아서 현실을 즐긴다는 것이다. 현실을 즐기는 만큼 임기응변에 강하고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샤넬이 변화무쌍한 패션계에서 100년 동안 최고의 위치를 지켜내지 않았나.
1910년 연인의 도움으로 파리에 모자가게를 내 성공한 후 1913년 옷가게로 확장해 운동복과 같은 단순한 의복 디자인에 도전했고, 한두 해 경험을 쌓은 후 샤넬은 본격적으로 고급 의상실을 차리기로 결심했다.
그당시에는 예술작품에 가까운 화려한 의상을 만들었고 모직이나 비싼 천으로 만든 의상은 화려하지만 활동하기 불편하다는 점에서 샤넬은 보다 실용적이고 단순한 옷을 만들었다.
남성용 속옷에나 쓰이는 값싸고 얇은 저지를 활용해 치마 길이를 과감하게 줄인 단색 드레스를 내놓았고 1916년 샤넬의 드레스는 대히트를 기록해 유명 패션잡지마다 소개됐다.
푸아레(당시 파리 최고 디자이너)는 샤넬의 제품을 "볼품없는 옷"이라고 폄하했지만 샤넬의 의상은 1차 세계대전 후 여성들의 변화된 생활에 더 적합했다. 여러 분야에 활동적인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편안하고 실용적인 옷이 요구됐다.
코르셋, 속옷 등 옷으로부터 구속받고 있었는데 샤넬이 여성의 몸을 해방시켰다. 샤넬의 의상은 파리 패션계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고 이후 여성복 디자인이 편리하고 단순하게 변했다.
1921년에는 파리의 의상실을 큰 곳으로 옮기고 디자이너 이름이 붙은
최초의 향수인 샤넬 No˚5를 출시
당시 향수에는 꽃이나 동물에서 채취한 천연 향을 활용했지만 샤넬은 화학첨가물을 섞어 미묘한 향기를 만들어냈고 향수담는 유리병은 대부분 유리 제조업자들이 공 들여 세공한 큐피드나 무용수 같은 아름다운 조각품 모양을 하고있었다.
그러나 샤넬No˚5의 용기는 납작한 직육면체의 단순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병 속에 담긴 금빛 향수의 빛깔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직까지도 디자인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샤넬No˚5는 전세계에서 많이 팔리는 향수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의상실 문을 닫을때까지 샤넬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15년동안 샤넬은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이때 프랑스 패션계는 디오르(Christian Dior)가 주도하고 있었다.
디올의 디자인은 이전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뉴룩이라고 불리며 꽉조인 허리, 부드러운 어깨선,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는 롱스커트로 여성의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이를 소화하기 위해 여성들은 다시 1920년대부터 사용하지 않던 코르셋, 거들 등을 착용해야 했고 샤넬은 뉴룩이 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디자인이라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결국 뉴룩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1954년 샤넬을 복귀하게 만들었다.
샤넬은 복귀 패션쇼에서 단순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파리 패션계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열광하였고, 미국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프랑스에서도 곧 샤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이제 뉴룩을 지지했던 사람들마저 허리에 꼭 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렸다.
샤넬 마크 위가 샤넬(CHANNEL)의 여성복
디올 마크 아래가 디올(DIOR) 여성복
샤넬이 현실을 즐기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던 까닭은 네가지 요건 때문.
첫째, 샤넬은 신념(Belief)가 뚜렷했다.
변화의 밑바탕에는 강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줏대없는 사람은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없다. 샤넬의 경우에는 옷에 대한 신념과 철학이 분명했다. 옷은 편리함과 단순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이 바뀌어도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둘째, 특유의 능력(Distinctive Capabilities)이었다. 스스로를 존중해야 현실을 즐기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능력을 믿는다는 얘기다. 샤넬 역시 의복 디자인에 대한 독창성을 믿었고 자신감이 있었다. 샤넬이 카피를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날 샤넬이 파리 시내를 돌아보던 중 "샤넬을 사세요. 색깔별로 다있습니다. 특가에 드려요" 하는 소리에 샤넬은 자동차를 세우고 그 여성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며 격려했다. "100프랑짜리 샤넬이 있다니 정말 기쁜일이군요, 계속하세요."
그당시 다른 의상실은 오트쿠튀르 협회를 결성해 디자인이 무단 복제되는 것을 감시하고 이를 어긴 모조품 업자를 고소했다.
하지만 샤넬은 다른 사람이 복제를 하면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이런 생각의 차이로 오트쿠튀르협회를 탈퇴.
물론 대범한 샤넬은 협회 탈퇴 후에도 비싼 연회비를 꼬박꼬박 지불했다.
셋째, 환경에 대한 민감도(Market Insight)가 뛰어났다.
동태적 역량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는 게 민감도, 즉 변화의 시그널을 익는 능력이다. 빅데이터를 도입해서 소비자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즉 신념과 능력이 있어야 시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넷째, 실험과 학습(Learning by doing)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샤넬은 의복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내놓은 결과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변동성이 커지고 변화가 빨라지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도 미래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둬야 할 때다. 기술, 제품, 시장의 미래 트렌드를 예측하고 계획하기 보다 현재 소비자에게 집중하며 동태적 역량을 키우라고 샤넬은 충고하고 있다.
뚜렷한 신념. 현재를 즐기는 것.
요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이 많이 올라온다. "현재를 즐기십시오, 몇 백원 아끼려고 저렴한 것을 먹는 것보다 먹고싶은 것을 조금 더 주고 행복감을 더 가지세요" 이런글을 봤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업의 성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산업이었고, 유망한 산업에 들어가서 경쟁하면 좋은 성과가 났고 쇠락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자해도 돈을 벌지 못했다.
기업의 전략은 산업을 분석하는 게 전부였는데 1990년대 일본 기업이 미국에서 득세하면서 같은 업종에서도 명암이 갈라졌다.
기업의 핵심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경쟁력이다.
기업뿐만 아니라 개개인은? 개인을 브랜드화 시키는것.
특유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요즘 시대에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아닐까.
이 내용은 DBR을 읽고 작성한 글이고, 이병주님(생생경영연구소장)의 편집글을 읽고 좋았던 부분과 본문의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저작권은 동아일보사 DBR 있음을 밝힙니다.
( 이병주 capomaru@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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