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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되는 이야기

뉴욕, 공포의 도시에서 I♥NY으로

 

 1970년대 초 만해도 더럽고 위험한 도시였던 뉴욕은 젊은이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도시로 몸값이 급상승했다희망이 없어보였던 도시를 재건시킨 것은 INew York이라는 한 줄의 슬로건이었다이를 통해 뉴욕시 주민들은 장밋빛 희망을 갖게 됐다뉴욕 시는 타임스퀘어의 볼거리브로드웨이 조명금융센터 등을 집중적으로 홍보하며 높은 범죄율과 교통체증 등의 단점은 숨기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펼쳤다뉴욕은 결국 도시 재생의 표본으로 거듭났다또 개발이냐보존이냐 하는 엄청난 갈등 속에 ‘보존 속 개발이라는 절충안을 펴냄으로써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됐다.

 

  

세계에서 젊은이들이 생활하기 가장 좋은 도시가 어디일까

안전성생활비다양성음식 및 패션 등 10여 개 항목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 2013년 캐나다 토론토, 2014년 프랑스 파리에 이어 2015년 미국 뉴욕이 1위로 떠올랐다서울은 21위였다.

 

생활 지수 산정을 주도한 시민단체 ‘청년도시들(YouthfulCities)’의 공동창업자 소냐 미오코비치는 “세계 인구의 절반이 30세 이하이고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각 도시가 청년들에게 매력을 제공하면서 이들이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게 돕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뉴욕이 어떤 도시였나

 

 더러운 지하철과 범죄로 유명한 도시 아니었나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뉴욕을 젊은이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세계 비즈니스의 중심으로 만든 것은 단 한 문장의 홍보 슬로건이었다. KOTRA 북미지역총괄본부장을 지낸 저자가 들려주는 뉴욕의 이미지 변신의 비결을 들어보자.

 

 

 

 

 

 

 

1970년대 초 뉴욕은 청소부들이 파업에 나서 길거리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던 곳이다지하철에는 험악한 낙서가 가득했고 공항과 기차역심지어 호텔에까지 소매치기와 강도가 들끓었다당연히 맨해튼에 있는 사무실 빌딩과 호텔은 텅 비어갔고기업들은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노동자에게는 우호적이고 기업에는 비우호적인 도시범죄자들이 들끓는 도시라는 평판이 확산되며 뉴욕은 점점 황폐해졌다.

 

 더 이상 손 놓고 앉아만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새각한 사람들은 뉴욕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고 1971년 결성된 더 좋은 뉴욕을 위한 모임'ABNY association for a better New York' 이다. 정부 고위관료 및 파워 브로커들을 초청해 조찬간담회나 강연해사를 가지고 모임에 초청된 정부 고위관료에게 ABNY는 세금 감면, 임대료 규제 완화 등 친비지니스 정책을 펼치도록 건의했고, 이는 상당 부분 관철됐다.

 

 ABNY는 뉴욕의 치안 강화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먼저 자비를 들여 경찰에게 방탄조끼를 지급, 그리고 각 건물을 지키는 도어맨들에게 무전기를 지급하면서 범죄를 발견할 경우 바로 경찰에 연락하도록 했다. 또한 24시간 작동되는 폐쇄회로CCTV를 타임스퀘어에 설치해 경찰이 직접 감시할 수 있게 했다. 이는 도시의 거리를 감시하기위한 최초로 설치된 CCTV로 기록됐다.

 또한 ABNY는 뉴욕관광청과 함께 빅애플 캠페인을 전개했다. 수십만 개의 사과 모양 옷핀, 스티커 등을 제작해 비즈니스맨들이 모이는 곳에서 나눠주며 뉴욕을 홍보했다.

 

 

 

 

 

 

그러나 ABNY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뉴욕시의 재정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은행연합회는 뉴욕시가 채권을 결제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1975년 초 새로 취임한 아브라함 D.빔 뉴욕시장의 채권보증을 거부함으로써 뉴욕 시는 아예 채권시장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돼버렸다. 결국 뉴욕 시장은 1975 5마여 명에 달하는 뉴욕시 소속 계약직 근로자를 해고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뉴욕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고였다. 그러자 경찰과 소방노조를 비롯한 공공안전노조등은 반발해 새로운 캠페인을 준비했다. 이름하여 공포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캠페인이었다. 노조는 뉴욕방문자를 위한 생존가이드라는 4쪽짜리 팸플릿을 100만 부나 인쇄해 배포했다. 이 종이엔 두건을 쓴 해골을 비롯한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귀가 포함돼 있었다.

 

 

 

-오후 6시 이후 거리에 나돌아 다니지 마라.

-걷지 마라

-대중교통 이용을 피해라..

-호텔방에 귀중품을 놓고 외출하지마라.

-화재를 조심하라

 

 

 지금 들어도 섬뜩한 내용이다

 도시 곳곳에 이러한 내용이 담긴 팸플릿이 퍼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폭발 직전의 긴장감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뉴욕은 망가져 가고 있었다.

 

 1977년 선출된 휴 캐리 뉴욕 주지사는 뉴욕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뉴욕상무부는 시장조사기관의 조언에 따라 타임스퀘어의 볼거리, 브로드웨이 조명 등 강조하고 풍부한 자연환경, 금융센터 등을 내세우는 쪽으로 홍보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범죄, 교통체증, 높은 노조 가입률 등의 부정적인 내용을 감출 것을 지시했다. 장점을 강조하고 단점은 숨기는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 생겨난 것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INY라는 뉴욕 로고다. 이 로고는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밀튼 글레이저가 디자인을 맡았는데 사실 우연히 냅킨에 스케치 한 것이었다.

 

 이것은 소비와 관련된 바이럴 마케팅의 최초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INY 캠페인속 긍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뉴욕은 점점 통제 불능 상황이 돼가고 있었다. 장기 실업, 공공 서비스 중단 및 축소,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정책 폐지, 방화 등 계속되는 악재 때문에 뉴욕의 주민들은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애써 이룩한 뉴욕의 이미지마저 조금씩 상해갔다. 뉴욕은 재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됐다.

 

 INY에 담긴 이미지는 뉴요커들의 일상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지만 지속적으로 뉴욕은 살기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환상을 심어주려는 뉴욕시의 전략은 조금씩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이 INY 티셔츠를 입고 기꺼이 캠페인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INY은 일반 대중에 유토피아적 충동을 일으킨 셈이 됐고, 이러한 충동은 정치적으로 쉽게 이용됐다. 더불어 대중매체를 통해 집중적으로 소개, 좋은 이미지 홍보 전략을 통해 여러곳으로부터 뉴욕 관광패키지에 대한 요청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INY캠페인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나자 INY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고 가장 성공적인 관광 프로그램이 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같은 추세는 계속 되었고, 비즈니스 출장자, 컨벤션 참가자, 외국 관광객들이 몰려들었으며 뉴욕 곳곳을 누비면서 많은 돈을 썼다. 이러면서 럭셔리호텔, 관광시설 등도 많이 지어졌고 뉴욕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한때 세계의 기업들이 손사래 치며 떠나갔던 뉴욕, 더럽고 무서운 도시의 대명사였던 뉴욕은 이제 INewYork 로고를 새긴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릴 만큼 세계인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지금 뉴욕이 세계비즈니스의 중심지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뉴욕은 도시 재생의 표본이다.

뉴욕의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놓고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존 속의 개발이라는 절묘한 개발방식을 통해 뉴욕은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이걸 만들어낸 INY이라는 단 한 줄의 슬로건에서 시작됐다. 바로 이것이 뉴욕의 DNA이자 성공 방정식이다.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뉴욕의 리브랜딩 전략에 버금가는 국가, 도시의 브랜드전략을 가지고 있는가는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듯

 

 

 

 

 

 

 

 

 

 

 

 

이 글은 DBR 178호 Essential Cases in book 글을 읽고 제가 요점을 정리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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