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난 방지와 빗물로 인한 보물 훼손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며 상자를 여러 개 쌓기도 쉽지 않았다.


보물상자는 왜 이런 모습일까? 먼저 보물상자의 주인인 왕족이나 귀족의 고민을 헤아려 보자. 그들의 가장 큰 고민은 보물이 도난당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보물을 담을 궤짝은 웬만해서는 파손되지 않도록 튼튼하게 짜야 했고 훔쳐 가기 어렵도록 묵직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단단한 재목을 큰 못으로 박고, 가로세로로 부목을 덧붙이고, 모서리에 쇠로 된 조각을 달아 좀처럼 깨지지 않도록 제작했다.빗물이 스며 소중한 보물에 녹이나 곰팡이가 스는 것도 큰 문제다. 그래서 물방울이 흘러내리도록 뚜껑을 둥글게 만들고, 안쪽은 양이나 돼지의 가죽을 덧댔다. 요즘으로 치면 귀중품을 보관하는 금고의 역할도 한 셈이다.

보물상자를 뜯어 고쳐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제니 황후의 짐을 꾸리던 루이 비통(Louis Vuitton)) 은 이런 보물상자가 도통 맘에 들지 않았다. 무거워 옮기기도 불편한데다 뚜껑이 둥글다 보니 높이 쌓아 올릴 수도 없다. 패션과 연회에 관심이 많은 황후의 나들이가 점점 잦아지면서 황후의 의상과 패물을 담은 궤짝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당시 파리의 패션을 주도하던 황후는 임신한 몸매를 숨기기 위해 주문했던 크리놀린(crinoline·버팀살을 넣어 풍성하게 만든 치마) 스타일을 즐겨 입었다. 또 타조 깃털로 화려하게 장식한 외제니 스타일 모자를 즐겨 썼다. 황후는 나들이를 갈 때마다 가장 호화로운 행차를 주문했고 루이 비통은 새로운 보물상자를 계속 개발해 많은 짐을 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루이 비통은 1821년 프랑스 동부의 산악 지대인 쥐라(Jura) 지방 안쉐(Anchay) 마을에서 태어났다.집안은 5대째 농사를 지으면서 목공소와 방앗간을 운영했다. 10살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고집센 루이 비통은 엄격한 계모와 지루한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13살에 가출해 파리로 무작정 상경했다. 빈털터리가 걸어서 470㎞ 떨어진 파리에 도착하는 데는 2년이 넘게 걸렸다. 지나가는 마을의 목공소나 식당, 마구간에서 일을 하고 끼니를 때우면서 여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루이 비통은 목재를 비롯해 가죽, 가구, 염색, 자물쇠, 양철 같은 다양한 재료나 제품을 다루는 기술을 조금씩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 도착한 루이 비통은 당시 최고의 짐짝 장인(trunk maker)으로 꼽히는 무슈 마레샬(Monsieur Marechal)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루이 비통은 이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가 짠 궤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고, 그가 싼 짐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자 마레샬은 루이 비통에게 외제니 황후의 일을 맡겼다.
전담 짐꾼인 루이 비통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황후는 1854년 번화가와 가까운 까푸신느 4번가에 포장 전문 가게를 열도록 후원하고 부유한 귀족 손님까지 알선해줬다. 루이 비통은 ‘가장 아름다운 옷을 정교하게 잘 싼다(packing the most beautiful clothes in an exquisite way)’는 황후의 칭찬을 들으면서 자신의 강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를 열면서 ‘어떤 깨지기 쉬운 물건도 안전하게 포장해 드립니다. 드레스 포장 전문(Securely packs the most fragile objects. Specializing in packing fashions)’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시골에서 상경할 때만 해도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지만 파리에서는 자신의 핵심 역량에만 집중하면 됐다.
목공에 자신 있는 루이 비통은 보물상자를 만드는 목재로 포플러를 택했다. 8∼10년생 포플러는 가볍고 질긴데다 물에 잘 젖지 않아 궤짝을 짜는 데 제격이다. 조직이 치밀한 너도밤나무는 부목을 대는 데 썼다. 궤짝을 짜는데는 못 대신 리벳과 아교를 주로 사용했다. 못은 녹이 쉽게 스는데다 목재를 갈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둥근 뚜껑 대신 납작한 뚜껑을 달아 여러 겹으로 쌓을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방수(防水)였다. 양가죽이나 돼지가죽은 오래되면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슨다. 루이 비통은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튜브에서 짜낸 유화물감을 칠하던 캔버스를 떠올렸다. 아마(亞麻)를 굵은 씨줄과 날줄로 오밀조밀하게 엮은 마포(麻布)에 풀을 몇 차례 먹여 방수성을 높인 뒤 궤짝에 붙였다. 이것이 1858년 등장한 루이 비통의 첫 작품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Gray Trianon Canvas)’다. 외제니 황후가 즐겨 찾던 베르사유 궁전의 별궁(別宮), 트리아농에서 그 이름을 땄다.
그가 짠 궤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고, 그가 싼 짐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자 마레샬은 루이 비통에게 외제니 황후의 일을 맡겼다.
가볍고 튼튼해서 운반하기 편한데다 비에 젖을 우려도 적고 좁은 공간에 많이 실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트리아농 캔버스는 파리의 왕족과 귀족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다. 루이 비통은 황후가 의상마다 챙기는 패물이 각기 다른 것에 착안해 궤짝 안에 작은 칸을 만들거나 서랍을 달아 부피가 작거나 파손되기 쉬운 패물을 함께 담았다. 마지막 남은 과제는 잠금장치. 당시 도난에 대비해 보물상자마다 자물쇠와 열쇠를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열쇠를 헷갈리거나 자칫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루이 비통은 여행용 트렁크가 강도들의 표적이 되자 자신만의 열쇠 하나로 여러 자물쇠를 열 수 있는 텀블러 잠금장치(Tumbler Lock)를 개발했다. 지금 루이비통 가방의 잠금장치는 액세서리로 남았지만 여전히 고객의 물건을 끝까지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믿음을 준다.
새로운 교통수단을 보고 여행의 시대를 예측하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운반도구는 남성 위주의 트러크 형태에서 여성 위주의 핸드백 형태로 옮아갔다. '옮기는 가방'이 아니라 '드는 가방'의 시대가 온 것. 루이비통은 증기선용으로 만든 캐빈트렁크의 세컨드백으로 1901년 스티머백을 내놓았다. 스티머백은 증기선을 오래 타면 늘어나는 빠랫감을 담기 위한 가방이었다. 이어 항공여행용으로 가볍고 질긴 소프트백이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인 핸드백의 시대가 열렸다.
스티머백

창업자의 가출에서 여행의 가치를 찾다
유명해지면 모방도 많아지는 법. 크리아농 캔버스의 복제를 막기 위해 개발한 스트라이프 캔버스나 바둑판 무늬 캔버스까지 내놓은 족족 모조품이 판을 치자 가업을 물려받은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는 1896년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아버지의 이름과 기하학적 무늬를 소재로 모노그램 캔버스를 등장시켰다.
모노그램이란 루이비통의 L과 V를 겹쳐 놓은 것처럼 여러 문자를 겹쳐 한 덩어리로 보이게 만든 도안이다. 이 모노그램은 루이비통 가문의 문장 같은 상징성을 만들어냈다. 조르주는 오트쿠튀르의 아버지로 불리는 찰스워스가 자신이 지은 옷에 사인을 하는 것을 보고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듯 캔버스에 L.Vuitton'을 새겨 제품에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1987년 루이비통을 인수해 LVMH를 설립한 베르나르 아르노회장은 모노그램 탄생 100주년을 맞아 루이비통의 패션사업 진출을 결심하면서 젊고 도발적인 34살의 마크 제이콥스를 아트디렉터로 앉혔다.


제이콥스는 루이비통의 전통적인 사치품에 팝아트를 입히면서 팝럭셔리 시대를 열었다.
루이비통은 크로아농 캔버스를 방수용 포장으로 개발했고, 조르주 비통은 캔버스에 모노그램을 넣어 쉽게 모방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제이콥스는 캔버스에 팝아트를 그려 넣었다.
캔버스는 원래 예술을 담는 화폭이었다.
루이비통은 창업자 루이비통의 여행에서 시작한다.
공룡이 번성했던 중생대 쥐라기의 흔적을 품고있는 웅장한 쥐라 산맥에서 1살 소년 루이 비통은 혼자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파리까지 470km. 하루도 쉬지 않고 걷는다면 보름 남짓, 마차를 타면 닷새 정도
지금은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를 소년은 2년동안 방랑했다. 들에 일렁이는 꽃과 밤하늘에 핀 별을 확인하며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꽃과 별을 소재로 하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모노그램은 소년의 꿈을 연상시키는 모티브다.
낙서로 뒤덮인 그래피티 모노그램은 소년의 열망을 드러낸다.
얼마나 파리에 가고 싶었으면....
시골뜨기에게 파리는 방랑의 목적지이자 인생의 목표였다. 루이비통 창업자의 여행 경험을 최고의 명품으로 승화시킨 브랜드다. 비싼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니는 사람들에게 소년이 가만히 묻는다.
'인생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까요?'
'Where will like take you?'
이 글은 DBR의 글을 읽고 제가 요점을 정리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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